아이띵소 | ithinkso 아이띵소 | ithinkso



불행 배틀

Script, 2024-04-23

희미하게 물건들이 널브러져 있는 모습이 보이는 캄캄한 방안.
이곳에서 불행 배틀이 열렸다. 참가자들은 돌아가면서 발언권을 가졌다.

먼저 A의 발언 기회.

“난 너무 불쌍해.. 내가 가고 싶은 곳이 있어도 마음대로 가지 못해. 왜냐하면 선우가 막거든.
그래 놓고 자기가 가고 싶은 곳으로 끌고 가는데, 그렇게 가는 곳이 고작 슈퍼야.
그럼 가방에 라면이랑 술을 담아서 다시 돌아오지.”

그때 B가 손을 들고 말했다.

“근데 선우가 뭐 많이 돌아다니는 것도 아니잖아. 맨날 방에 박혀있는데…
그렇게 치면 내가 더 불쌍하지. 나 지금 얼마나 냄새나는 줄 알아?
이 기름기 가득한 느낌이랑 냄새 때문에 나 자신도 너무 역할 정도야.
다시 깨끗해지고 싶은데 선우가 저렇게 방에 박혀서 날 안 씻겨 주니까 너무 괴로워..”

“괴로운 건 알겠는데, 안 씻으면 죽냐?” 듣고 있던 C가 건조하게 반박했다.

“난 지금 다른 건 차치하고 물도 안 마신 지 오래돼서 죽을 것 같다고.
너네도 알지? 물 오랫동안 못 마시면 진짜 죽는 거.
선우는 내가 말라비틀어질 것 같은 괴로움에 진짜 죽겠다 싶을 때쯤 물을 줘.
난 그걸로 또 연명하다가 또 괴로워하고… 반복이야. 너무 불쌍하지 않아?”

“야. 그래도 결국 죽기 전엔 물 주네.” 이번엔 D가 반박했다.

“이거 보여? 다 갈라지고 찢어진 거? 난 언제나 항상 이 상태야.
이미 이렇게나 엉망인데 이선우 그 자식은 감정 조절이 안 되면 계속 날 뜯고, 긁어.
얼마나 아픈 줄 알아? 정말 직접적인 폭행을 당하는 건 나 하나야.. 나보다 불쌍할 순 없어…”

D의 말이 끝나는 것 같아 보이자 E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사실 나는… 앞이 잘 안 보여.
원래 그랬던 건 아니야. 처음엔 조금 시력이 떨어진 정도였어.
그런데 언젠가부터 선우가 나를 컴퓨터 앞에서 계속 모니터를 보게 하더라고.
내가 너무 건조하고 피곤하다고, 제발 쉬게 해달라고 빌어도 억지로 계속 컴퓨터를 보게 했어. 그리고 결국 지금의 상태가 됐지..
너네는 시간이 지나거나 씻거나 마시면 회복되지만 난 안 돼. 그걸로 끝이야.
내가 제일 불쌍해…”

격했던 불행 배틀 분위기는 발언이 다 끝나자 점점 사그라들었다.
침울한 분위기가 이어지고 있을 때, 그들의 발언을 들었던 누군가 말했다.

“근데, 이 불행 배틀이 의미가 있나? 어차피 다 한몸인데…
뭐 굳이 꼽자면 불쌍한 너희들을 다 갖고 있는 선우가 제일 불행하지 않을까 싶네.”

“아… 그렇네. 근데 잘 안 보여서 그러는데 너는 누구야?”

“나? 나는 선우의 머리야.”


Editor : 김수미